좋은 영화란 무엇을 말함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의 본질, 영화의 기능, 영화의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만 답을 할 수 있다. 거기에다 개인마다 각 부분에 대한 중요도가 다르기 때문에 한 사람의 답은 그 사람만의 답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개인적일 수 밖에 없는 영화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려고 한다. 이는 본인도 마찬가지이다. 이유가 뭘까? 좋은 것은 나눠야 한다는 강박관념? 아니면 좋은 사고, 가치관을 공유함으로써 일관성있는 공동체의식을 만들기 위해? 그 무엇도 영화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설명시켜 주기에는 조금씩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간만에 한국 영화로서 좋은 영화라고 칭송받을 만한 작품이 나왔다. 그동안의 한국 영화는 소위 외적 팽창에만 몰두한 감이 없지 않은데, '소설포비아'라는 이 작품은 최근에 만들어진 한국 영화의 완성도를 훌쩍 넘어서는 수작이라고 평가받을 만한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된다.

먼저, 영화의 바탕이되는 각본의 완성도는 만점에 가깝다. 치밀하게 짜여진 이야기 구조에는 흠을 잡을 만한 구석이 없다. 소재 또한 2000년 이후 사회의 한 요소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온라인'에 대한 모습을 포괄적이고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온라인 상의 접속의 형태인 트위터, 쪽지, 채팅, 온라인 카페 등 가능한한 모든 종류를 흐름에 맞게 배치하고 있으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접점인 부분인 현피, 온라인 별명 등을 핵심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온라인이 온라인 안에서만, 현실사회는 현실사회에서만 그 기능을 다 할 뿐 서로 섞이지 않는다면 사회 요소의 한 축으로 '온라인'이라는 것이 인정 받지 못햇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온라인과 현실 사회가 이미 분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고 혼재되어 있다.

온라인 상의 익명성과 현실 사회의 익명성은 그 의미가 다르고, 해킹이라는 온라인 상의 범죄가 온라인 상에만 그 피해를 입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 사회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이 영화는 꽤뚫고 있다.

독립 영화라는 분야 자체가 상업적 투자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적은 자본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제작 환경은 열악할 수 밖에 없으나, 반대로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감독이나 제작작의 소신대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을 갖고 있다.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감독이나 제작자의 최우선 목적이 '돈'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 영화는 상업성 보다는 이념성에 보다 경도되어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 영화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날카롭고 섬세하게 폭로하면서도 상업적 재미를 함께 성취하고 있어 소위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몇 안되는 영화 중의 하나라고 평가한다. 이 영화의 관객 수가 겨우 25만 명 정도에 그쳤다는 것이 안타깝다. 대기업 자본을 들여 붇는다고 명작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님을 이 작품이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데뷔작으로 이 영화를 만든 홍석재 감독의 앞으로의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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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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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접하기 힘들었던 팔레스타인 영화 한편을 보았다.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 감독의 ‘오마르’라는 작품이다. 제66회 깐느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팔레스타인의 현재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팔레스타인 영화를 향유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서구 문화는 미국을 통해서 수입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이외의 국가를 통해서 서구 문화가 직수입되기는 하지만, 미국을 통해서 수입되는 문화의 양과 비교할 바가 되질 못한다.

영화의 내용은 오마르라는 제빵 기술을 가진 주인공이 팔레스타인 장벽을 넘나들며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다가 벌어지는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마르는 친구인 ‘타렉’과 함께 ‘암자드’가 이스라엘 군인을 살해하는 일에 가담을 한다. 이후 이스라엘 비밀경찰은 범인을 타렉으로 특정 짓고 오마르를 연행하여 타렉의 행방을 취조한다. 오마르는 이스라엘 비밀경찰의 온갖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버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오마르가 변절한 배신자라고 생각을 하고, 오마르와 연인 관계인 타렉의 여동생 ‘나디아’ 역시 오마르를 의심하자 오마르는 이를 괴로워한다.

이스라엘 경찰이 실제 범인인 ‘암자드’가 아닌 ‘타렉’을 좇는 것에 의심을 품은 오마르는 친구 ‘암자드’를 추궁한 끝에 이스라엘 경찰의 끄나풀이 ‘암자드’라는 것을 밝혀낸다. 친구의 배신에 격분한 오마르는 ‘암자드’의 정체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폭로하려고 하나, ‘암자드’가 자신의 여자 친구인 ‘나디아’ 사이에 아기를 가졌다고 고백하자 오마르는 나디아를 걱정하여 암자드를 용서하기로 한다.

오마르는 ‘타렉’에게 ‘암자드’와 함께 암자드의 배신 행위와 나디아의 임신 사실을 이야기한다. 사실을 알게된 타렉은 격분하여 암자드와 몸싸움을 하게 되고, 결국 암자드에 의해 살해된다.

이슬람의 율법 상 혼전 임신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오마르는 자신이 나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모아둔 돈 전부를 친구 암자드에게 주고, 암자드가 나디아와 결혼하는 것을 돕는다. 시간이 흘러 오마르는 암자드와 나디아 집에 방문하게 된다. 아이들을 결혼 후 1년 이후에 낳은 사실을 알고 나디아가 혼전 임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스라엘 비밀경찰의 오마르에 대한 강요와 저항이 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팔레스타인의 현실과 결부시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특히 현재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핍박을 보면 영화 속의 이스라엘 비밀 경찰의 비인간적 행위가 오버랩되면서 거기에 저항하는 오마르의 행위는 영웅적으로까지 여겨진다.

그러나, 자신의 여자친구 나디아가 혼전 임신했다는 친구 암자드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사실확인도 하지 않고 친구와 결혼을 시켰다는 점, 친구의 거짓말로 인해 자신이 위험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그 친구를 용서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오마르는 영웅이 아니라 남성중심 문화에 의해 태어난 괴물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특히, 혼전 임신한 여성은 명예 살인의 대상이 되고, 결혼의 결정은 여성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가족의 남성 대표자에 의해 진행되는 등의 이슬람 문화는 폭력적 남성중심 문화의 정점으로 여겨진다. 간만에 팔레스타인 영화를 보면서 기대를 했던 본인은 영화 속에서 남성 중심 문화의 폭력성만 확인하게 된 것같아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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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늑대
Eule der Miner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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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에도 나오듯이 장혁, 신하균, 강하늘 등(이하 포스터 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출연하여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영화, ‘순수의 시대’.


영화의 제목을 미루어 본다면, 언뜻 ‘순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영화인지, 아님 어떤 ‘시대’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다음으로, 포스터 제목의 윗부분에 붉은 글씨로 ‘조선 개국 7년, 왕자의 난 / 역사가 거부한 핏빛 기록’이라고 씌여진 것에 눈길이 간다면, 당연히 조선 초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영화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일부 관객들의 관람평을 보면, “시대극인 줄 알고 관람을 했는데 성적 표현이 과하게 나오는 애로물이어서 결과적으로는 속았다.”라는 내용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결국 관객들이 작품을 감상한 결과로는 조선 초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영화라는 것이다. 즉, 관객들은 작품의 제목 중 ‘시대’에 방점을 찍고 영화를 선택하고 관람을 했다면, 감독은 ‘순수’에 방점을 찍고 작품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관객들의 이러한 반응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어떤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설정된 ‘조선 개국 7년, 왕자의 난’ 과 이 작품의 서사적 내용은 연관성이 그다지 없는 사건일 뿐이다. 단지 포스터에 그렇게 씌여져 있고, 작품에 ‘왕자의 난’이 잠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 작품을 ‘시대극’으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에 대해 웨스턴 리벤지 영화평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이 작품의 내용은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순수’에 대한 고민이다.


영화의 영어 제목이 'Empire of Lust’ 인 것을 알게 되면, 영화를 감상한 사람들은 한국어 제목보다 영어 제목이 영화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영어의 제목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정욕의 제국’ 정도가 될 것이다.(사실 우리말 제목인 ‘순수의 시대’와 영어 제목인 ‘정욕의 제국’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다. 순수, 시대, 정욕, 제국 이라는 단어가 함께 쓰이기에는 너무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감독은 영화 제목의 작명을 이렇게 했을까? 감독의 의도보다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 작명일까? 그러나, 단순히 제작사나 유통사에서 흥행을 고려해서 작명을 감독에게 강요했다고 보기에는 미심쩍다. 어차피 작품에 대한 평가, 즉 흥행은 제목이 아닌 내용에 달려있기 때문이다.(국제시장이라는 영화의 흥행은 제목보다는 내용 때문이 아닌가!)  물론 선정적인 제목으로 관객을 낚고, 낚인 관객이 그 작품에 대한 혹평을 하는 경우가 최근 많아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진 저예산 영화에서 보이는 병폐일 뿐, 이 작품과 같이 메이저 제작사와 유통사에서 투자한 작품을 대상으로 관객을 ‘낚는’ 마케팅을 했으리라고는 쉽게 생각하기 어렵다.


영어 제목과 한국어 제목을 병치시켜 감독의 의도를 한번 살펴보자. 영어 제목의 조어 방식과 한국어 제목의 조어 방식이 같기 때문이다. 제목의 단어의 관계를 살펴보면, ‘순수’와 ‘정욕’, ‘시대’와 ‘제국’ 을 각각 대응시킬 수 있다.


먼저, ‘시대’와 ‘제국’은 서로 치완될 수 있는 성질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와 ‘조선 왕조’ 같이 역사적으로 왕조를 시기별 구분으로 관습적으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신라시대의 경우, 신라 왕조가 있던 시대 라는 뜻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남은 단어인 ‘순수’와 ‘정욕’은 하나의 대응 어휘로 볼 수 있고, 앞서 이 둘 간의 단어의 관계는 ‘시대’와 ‘왕조’의 관계처럼 등가적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감독은 어떤 면에서 ‘순수’와 ‘정욕’을 등가적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정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다. (‘정욕’은 ‘성욕’과 거의 비슷한 의미로 씌여진다고 본다면, 성욕과 정욕을 동일시해도 좋을 듯하다. ‘성욕’은 보다 성행위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정욕’은 성행위와 함께 감정적 교감도 함께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감독은 ‘순수’로 보고 있는 듯하다.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 박혀있는 유교적 금욕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수준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포스터의 인물을 가지고 이들이 각각 ‘욕망’ / ‘순수’ / ‘타락’의 아이콘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방원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갈망하고, 김민재는 순수한 사랑을, 진은 단순한 육체적 욕정만을 추구하는 인물이고, 이들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로 이 작품을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포스터의 3명의 인물 모두 ‘권력’에 대한 욕망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3명의 인물 모두 여주인공 가희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욕망/순수/타락의 구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사회 문화는 토론에 익숙하지 않다. 사회 전반적으로 ‘장유유서’ 정서가 긍정되고, 합리화되는 사회에서 ‘아랫’ 사람이 제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호적인 토론을 통해서가 아닌 ‘상명하복’이라는 일방적인 의사 전달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때마다 바탕이 되는 정서가 ‘장유유서’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는 건전한 토론 문화와 함께 나와 사고가 ‘다른’ 이들에 대한 관용이 없다시피 하다. 우리 사회의 경색된 토론 문화는 ‘성’과 결합하면 더욱 경직된다. ‘성’에 대한 담론은 고사하고 토론하는 것 조차 경계한다. 특히 어른과 ‘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폐륜에 가까운 행위로 치부된다. 그러다 보니 현재 우리 대중문화에서 ‘성’은 단순히 흥미거리 또는 화제거리로서의 topic 일 뿐인 신세로 취급된다.


감독은 이러한 ‘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대극이라는 형식을 빌어 ‘순수란 우리 인간의 본연의 욕망에 충실해질 때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혼돈의 시기라고는 하지만 조선 건국 초기에는 이전 시기보다 한층 더 강력한 도덕적 자질이 상류층에게 요구되던 시기였다. 이전 왕조에 대한 항거(?) 내지 반란(?)의 이유가 부폐한 사회로부터 토탄에 빠진 양민을 구원하는 것이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의 배경이 되던 당시 사회는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보다 강력한 유교적 덕목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윤리적 굴레에 속박되어 있었을 것인 작품의 등장인물 김민재(신하균 분), 진(강하늘 분) 등의 인물 행동으로 아무리 엄격한 윤리가 적용되는 사회일지라도 ‘성’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억압할 수는 없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성’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시선은 단테의 신곡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단테는 신곡의 지옥편, 연옥편에서 ‘정욕’을 가장 가벼운 죄로 취급한다. 특히 연옥편에서 나오는 7가지의 죄의 씨앗들인 Gluttony(탐식)', 'Greed(탐욕)', Sloth(나태), Envy(시기), Lust(정욕), Pride(교만), Wrath(분노) 중에서 정욕의 죄의 경우 쉽게 죄를 씻을 수가 있어 천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작중에서 주인공 김민재는 마지막의 자신의 ‘정욕’을 참고, 가희라는 여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면,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방원이 획책하는 ‘왕자의 난’을 쉽게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김민재는 이를 포기하고 가희라는 여자를 선택함으로써 함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영화의 감동은 바로 김민재와 가희의 사랑으로 촉발되는 안타까움과 아쉬움, 그리고 처절한 슬픔이지, 역사적 사건에서 나오는 쾌감이나 비장미 따위가 아니다.(영화 ‘명량’은 이에 반해 역사적 사실을 추구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쾌감과 비장미을 선사한다.)


따라서 이 영화를 역사극의 하나로 취급하여 이를 바탕으로 이 영화를 판단한다면 큰 오류에 빠지는 셈이다. 이 영화는 순수라고 일컬어지는 상상의 개념과 우리 인간의 삶의 모습과의 일치점이 무엇인가를 찾고 고민하는 영화로서 취급하고 평가해야지만 이 영화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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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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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퍼 무비(Caper Movie/범죄영화) 장르에 속하는 영화인 기술자들.


케이퍼 무비 장르는 범죄의 계획, 모의, 실행에 중점을 둔 범죄 영화이다.

외국영화로는 스팅,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 등이 있고, 우리나라 영화로는 범죄의 재구성, 도둑들 등의 영화가 대표적이다.


케이퍼 무비의 재미는 2가지에서 원천한다고 하겠다.

첫번째는 작품 속에서 시도되어지는 범죄가 성공하느냐의 여부이고, 두번째는 범죄 실행 단계와 마무리 단계에서 벌어지는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인한 뜻밖의 결과이다.

과거 미국에서는 소위 '범죄자'들이 벌이는 '범죄'가 성공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아서 범죄는 실패로 마무리되게끔 했다. (1960년에 개봉한 '오션스 일레븐' 원작 역시 마지막에 돈을 넣은 관이 불에 태워짐으로써 범행은 성공했으나 범죄 수익은 '0'인 상태로 끝난다.)

따라서 두번째 요소로 재미를 관객에게 제공하는 방향으로 영화를 이끌었다.


케이퍼 무비의 두번째 재미는 잘짜여진 '플롯'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플롯'은 캐이퍼 무비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이야기 - 스토리를 시간적 배열이 아닌 작가의 의도에 맞추어 배열하는 것이 플롯이다. 작가의 의도는 대부분 반전을 위한 노림수다. 캐이퍼 무비는 진행 중간마다 알맞는 흥미 요소를 배치하고 마지막에 관객의 허를 찌르는 반전을 이루어냄으로써 극대화된 재미를 얻는다.

영화의 진행, 즉 범죄의 계획, 모의, 실행에서 일어나는 시간적 흐름 속에서 반전 내지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단서를 이야기 속에 감춰놓고, 이를 나중에 관객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식의 구성이 케이퍼 무비 장르의 일반적 속성이다.

역대 캐이퍼 무비로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2012년 1,2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도둑들'이 있다.(더불어 '타짜'도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도둑들'은 케이퍼 무비의 미덕을 모두 갖춘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기술자들은 어떤가?
이 작품의 감독인 김홍선씨는 이전에 '공모자들'이라는 영화를 연출하였다. 영화 '공모자들'의 경우 당시 우리 사회에 이슈가 되었던 장기 밀매, 중국에서의 비밀 수술 등의 이슈 아이템을 가지고 탄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제작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술자들'에 거는 기대 역시 컸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그야말로 제작비만 낭비한 그저그런 영화에 머물러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겨우 관객수 250만명을 넘겨 제작비 70억원을 가까스로 회수한 작품으로 남았다. 많은 돈을 투입한 영화의 화려한 장면도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했고, 탄탄한 줄거리가 기본이 되어야 할 케이퍼 무비의 기본도 지키지 못한 채 주먹구구식의 구성,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감도 주지 못하는 연출력 등 총체적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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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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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의어, 동음이의어 등을 이용한 말장난(pun)은 어린 시절부터 자주 즐기던 놀이이다. 인간은 언어의 동물이기에 인간에게 말장난은 본능적인 유희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연애'는 바로 가장 친근한 유희인 말장난을 사용하여 관객에게 재미를 주고자 노력한 작품이다.

예를 들어 이 작품에는 '조슬잡고', '사발로마', '족가시오' 등의 욕과 비슷한 말들을 한자를 이용한 사자성어로 활용하고 있다.

참고로, 위의 말에 대한 작품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 조슬잡고(眺膝雜苦): 무릎을 마주하고 괴로움을 함께한다는 뜻으로 남의 아픔을 함께하는 품성을 의미

• 시발로마(施撥勞馬): 경주마처럼 열심히뛰고 근면성과 남들에게 베풀줄 아는 인품을 가졌다는 의미

• 족가시오(足加示梧): 만족을 더하여 깨달음이 보인다는 뜻으로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미덕을 일컷는 말


2015년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한자 사용이 보편적이지 않다. 19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한자 사용이 보편적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가히 격세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한자의 사용보다는 영어의 사용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한자가 아닌 영어로 pun 을 구성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작품의 전개는 전형적인 로멘틱 코메디 장르의 특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로멘틱 코메디의 전형을 따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감상하는데 아무 불편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장점이라고 할 이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이다. 이전에 제작된 로멘틱 코메디와 아무런 차이점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퇴보한 느낌마저 준다. 


한국 영화에 있어서 로멘틱 코메디는 친숙한 장르가 아니다. 로멘틱이란 단어의 뜻에서 내포하듯이 작품에는 어느 정도 성(性)적인 부분이 존재할 수 밖에 없고, 우리 한국 사회에서 성(性)은 편집증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회피하려고 하는 부분이다. 성(性)을 내세우게 될 때는 아예 성인 영화라는 타이틀을 붙이기를 마다하지 않고, 성적인 부분에서 이슈화 되어 흥행을 도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멘틱 코메디 장르를 표방하고 제작한 작품은 성(性)적인 부분에서 화제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최근에 개봉한 한국 영화인 '결혼 전야', '워킹 걸' 모두 상당부분의 성적인 표현이 작품에 존재하지만, 이를 이용해 흥행을 노리지는 않았다. 위 2 작품 모두 흥행에 실패한 결과를 보였지만, 이를 두고 성적 장면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던 마케팅의 실패라고 보긴 어렵다.


제목 '오늘의 연애'는 오늘의 날씨라는 어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여자 주인공이 TV 방송에서 '오늘의 날씨' 코너에 출연하는 날씨 캐스터로 설정되어 있고, 작품의 시작과 작품의 포스터 역시 오늘의 날씨를 컨셉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초등학교 교사인 남성 주인공, 날씨 캐스터인 여성 주인공의 직업이 작품의 내용과 관련이 있을까? 작품의 서사적 진행에 거의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겨우 여성주인공의 경우 해고 사유가 '공인'이기 때문에 통하는 정도가 작품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고나 할까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관하다.

결국 작품의 서사적 내용은 주인공의 직업, 성격 등과 관련을 맺지 못하고 그저 로멘틱 코메디 전개의 공식을 반복만 할 뿐이다. 


로멘틱 코메디의 흔한 스토리 전개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참신함을 잃은 대표적인 작품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더우기 이 작품의 흥행을 위해 같은 대기업 계열사인 제작사, 배급사가 개봉관 몰아주기 등의 행동을 하면서 다양한 한국 영화가 개봉할 극장을 잡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는 등의 잡음이 많았던 점을 비춰본다면, 이 작품의 완성도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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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느낌의 서부영화이다!' vs '구색만 겨우 갖춘 진부한 서부영화이다' 라는 상반된 평가가 이어지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를 호평하는 쪽이든 혹평하는 쪽이든 이 영화의 장르가 서부 영화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매즈 미켈슨이 주연인 이 영화는 기존 서부영화와 100% 일치하는 듯한 외양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 내용을 자세히 들어다 보면 기존 서부영화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서부영화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미국영화협회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AFI defines "western" as a genre of films set in the American West that embodies the spirit, the struggle and the demise of the new frontier.


미국영화협회(AFI)는 서부영화(Western)를 "미국서부시대에 있었던  신개척지의 정신, 투쟁 그리고 종말을 구현하고 있는 영화들(집합)"을 묶는 하나의 장르(종류)로 규정한다.


즉, 서부영화는 (1)서부시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2)신개척지의 정신 (3)투쟁 (4)종말 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통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서부시대는 구체적으로 서부개척시대라고 할 수 있다. 위키백과에는 서부개척시대를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서부 개척 시대(西部開拓時代)는 19세기 (특히 1860년대부터 1890년까지)에서, 북아메리카의 시대 구분의 하나. 올드 웨스트(Old West), 와일드 웨스트(Wild West)라고도 불린다. 시대 구분과 함께 이 시대의 프론티어 스트립 (노스다코타에서 텍사스까지 남북에 걸쳐 6개의 주)의 역사, 전설, 신앙 등 문화적인 의미를 포괄하는 용어이기도하다. 1848년에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골드 러시의 도래가 개척을 뒷받침했다. 또, 1869년에는 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 철도가 개통했다. 한편 원주민인 인디언에게는 갑자기 온 침략자들에게 자신들의 땅을 강탈당한 데다 살육 된 시대이기도하다. 

 - 위키백과 -


이 당시는 미국 서부지역은 굉장한 혼란의 시기였다. 1865년 링컨 사망 이후, 흑백의 갈등, 원주민과 개척민간의 갈등,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 등이 첨예하게 발생하던 시기이다.(미국드라마 'Hell on Wheels' 가 바로 이 시기의 서부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서부시대'는 단순히 시대와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의 시간과 공간'의 의미까지 함께 내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서부시대'는 즉, '서부시대'라는 것은 19세기라는 시간적 배경과 미국의 서부 지역이라는 지역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혼돈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신개척지의 정신은 무엇인가?

기존의 사람이 살고 있지 않던 척박한 환경에서 주인공이 노력하여 온갖 역경을 이겨내는 정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의 투쟁은 총잡이 간의 총싸움이다. 총싸움은 여러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대개 공정한 총싸움과 불공정한(혹은 비겁한) 총싸움으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로 합의된 공정한 방법을 통해 1 vs 1의 대결을 결투라 칭한다.결투는 일정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태에서 총을 뽑아 상대를 맞추는 총싸움 방법이다. 결투는 오로지 속도와 정확성으로 실력을 겨루는 것이다.


서부영화는 소위 '영웅'으로 구전되던 이야기의 주인공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 

(서부영화가 성행했던 1950-1960년대는 미국 경제의 호황기였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풍요는 신으로부터의 우연한 선물이 아닌 자신들의 성실한 노력으로 획득한 정당한 것이라는 가치-바로 서부영화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며 정당화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 



(4) 종말은 악인은 결국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선인은 영웅으로서 칭송을 받고 투쟁의 결과물로 여성과 맺어진다.

勸善懲惡. 착함을 권장하고 악함을 징벌한다는 세계관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이다. 거기에 주인공의 영웅적 행위에 대한 보상의 하나로 여성 주인공과 맺어지는 설정이 더해진다.(작품에서 남성주인공과 여성주인공의 관계는 여성을 하나의 전리품으로 취급하는 극악한 정도의 남성중심주의 사고가 바탕으로 깔려 있다. 이에 대해서도 기회가 되면 後述한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서부 영화는 19세기 미국의 서부를 배경으로 주인공의 노력으로 척박한 환경에서 이겨내고, 그 과정에서 악인을 만나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이겨 악인을 물리치고 선(善)을 수호하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앞서 살핀 서부 영화의 정의를 바탕으로 웨스턴 리벤지(The Salvation)를 살펴보자.

먼저, 웨스턴 리벤지(The Salvation)의 배경은 시대적으로나 공간적으로 (1)에서 이야기하는 서부시대와 부합한다.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미덕이 (2)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작품을 들여다봐야 한다. 웨스턴 리벤지(The Salvation)에서 (3)의 투쟁은 1 對 多의 양상으로 벌어진다. 물론 주인공에게 조력자는 있지만, 첫 조력자는 죽임을 당하고, 두 번째 조력자는 전문 총잡이가 아닌, 단순 가담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작품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온전히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많은 악당을 상대로 정정당당하게 겨룰 수는 없다. 주인공은 본래 전문 총잡이도 아니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와서 새로운 땅을 개척하여 이제 겨우 끼니를 이어갈 수 있는 형편이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악당과의 결투는 정정당당한 결투를 할 형편이 아닌 것이다. 대다수 서부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영웅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아마도 주인공이 여타 다른 서부영화와 같이 '영웅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결투의 양상은 정정당당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4)의 결말은 기존의 서부영화와 같이 권선징악으로 끝맺음을 한다. 따라서 영화의 결말은 기존 서부영화의 관습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웨스턴 리벤지(The Salvation)는 서부 영화인가? 이에 대한 답은 (3)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할 수 있을 듯하다. 작품에서 촛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이 바로 (3)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제목이 웨스턴 리벤지(The Salvation) 아닌가. 원제 The Salvation은 자력구제(自力救濟)를 의미하고, 우리말로 번역된 제목 역시 '서부의 복수'를 의미한다. 결국 작품의 주된 주제는 주인공이 스스로의 힘으로 개인의 원한을 갚는 과정임을 제목에서 말해주고 있다.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ㄱ)악인1의 주인공 가족에 대한 악행 → (ㄴ)주인공의 복수 → (ㄷ)악인1의 죽음 → (ㄹ)악인1의 형인 악인2의 복수 → (ㅁ)주인공의 시련 → (ㅂ)주인공의 복수 → (ㅅ)악인2의 죽음 → (ㅇ)대단원

으로 진행을 한다. 전체적인 내용은 주인공과 악인 간의 얽히고 얽힌 복수의 순환 끝에 선(善)한 주인공이 악(惡)한 상대편을 무찌르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ㄱ)부터 (ㅇ)까지의 서사 진행은 다른 서부영화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ㄱ)의 대한 (ㄴ)의 행위는 그야말로 자력구제이다. 자신의 가족이 악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고, 그 악인이 자신의 눈 앞에 있다면, 어느 누가 자력구제의 유혹을 떨칠 수 있을까? 주인공은 자력구제를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 여기까지는 여느 서부영화와 다를 점이 없는 부분이다.

여느 서부영화와 다른 점은 (ㄹ)이후의 전개이다. 보통 여느 서부영화의 경우 (ㄹ) 이후 부분부터는 악인의 자력구제를 통해 진행된다. 악인의 행위는 기존의 정의구현체제-즉, 법 시스템-에서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사회의 법 시스템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존 서부영화와는 정반대로 악인이 저지르는 악행은 기존의 법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반면에 주인공의 정당한 행위는 법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함으로 인해 사건이 진행되는 것이다. 


결투의 긴박함, 결투의 결과 등은 기존 서부영화의 진행 방법과 유사하다고 할 지라도, 작품의 성립 근간이 되는 결투의 원인이 사회 시스템의 부당함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볼 때에, 이 작품은 기존 서부영화의 장르의 특징을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유형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ㄹ) 이후 부분부터 서사 진행을 보면, 악인2는 기존 정치 체제의 지원과, 경제적 지원, 사법 체제의 지원을 등에 업고 주인공을 핍박하게 되고, 정치, 경제, 사법 체제로부터 고립된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자력구제를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내용이 이 작품의 주요 서사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의 주제는 사회 시스템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 시민이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서부영화의 장르로 귀속하여 여느 서부영화와 동급으로 취급하여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웨스턴 리벤지(The Salvation)은 단지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할 뿐, 과거-현재-미래 로 이어지는 사회 시스템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결과로 탄생한 작품인 것이다.




WRITTEN BY
사망늑대
Eule der Miner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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